치카님 글커미션
위스퍼레인은 영혼에 색이 있다면 죽은 남자의 것은 분명 시린 하늘색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가끔 희기도 한.
죽은 남자는 사실주의자였다.
하인즈는 현실에 근간을 둔 것을 좋아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면 취급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았다. 그런 그와 본 영화가 하나 있었다. 현실성과는 거리가 먼 삼류 영화였다. 주인공은 인간 영혼의 색을 볼 수 있다는 설정의 캐릭터였다. 내용은 형편없었다. 정말 뻔하고 지루하기까지 했다. 영화의 내용은 이제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난 뒤에 남자가 툭 던지듯 물었던 질문은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었다.
정말 영혼에도 색이 있을까요?
네?
아, 질문이 잘못되었을 수도... 영혼의 색 때문에 우리에게 색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요?
색이 투과되어 보인다는 이야기... 인가요?
네, 맞아요.
하인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여자는 머릿속으로 간단한 이미지를 상상하고 다시 말을 꺼낸다.
그럼 우리 신체는 영혼을 잃으면 투명해지나요?
글쎄요. 죽은 사람을 본 적 있어요?
수도 없이요.
그들의 몸이 투명해졌나요?
여자는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한다.
색이 옅어졌을 뿐이에요.
하인즈는 그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팔짱을 꼈다. 역시 위스퍼레인처럼 본질이 투명해야 비로소 투과되는 걸까요?
해파리처럼요?
네, 해파리처럼.
글쎄요... 그러면 제 영혼은 무슨 색으로 보이시나요?
선명한 남색이요. 가끔은 하얗고...
죽은 남자는 위스퍼레인의 영혼이 가끔 하얗다고 했다. 그 역시 그랬다. 푸르렀지만 투명해질 즘엔 시리도록 하얀색이었다. 죽은 뒤에는 푸른빛이 옅어지고 온통 희었다. 그의 시체를 본 여자는 물드는 거구나, 하고 읊조렸다. 자신처럼 투명하지 않은 인간들은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감과 함께 물이 빠져서 옅어졌다. 위스퍼레인은 그걸 보고 문득 생각했다. 옅어지고 싶지 않아.
하인즈의 죽음 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평소처럼 바다를 봤던 것 같다. 그녀는 종종 이처럼 기억의 감각이 무뎌질 때가 있다고 느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여자. 기억은 새로이 가지고 태어나는. 그렇기에 사라질 것들에 대해 마음을 두지 않아야 했다. 예컨대 기억 같은 것 말이다.
무뎌지고 무뎌져도 뭉툭한 심지를 지닌 채 그대로 살아야 하는 것. 저기 저 우윳빛 포말처럼 덧없이 사라질 것들. 그래서 위스퍼레인은 형체 없는 기억 대신 영화 티켓 따위의 물건을 모았다. 참 다행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자가 죽더라도 사라지지 않아서.
여자는 바다가 보이는 절벽 위에 서서 가방을 연다. 가방 안의 파일에는 소중히 모아온 영화 티켓 뭉치가 있었다. 모두 하인즈와 본 영화의 티켓이었다. 창고에서 찾아낸 티켓 발권기가 고장 난 탓에, 비슷한 재질의 종이를 오린 후 그 위에 직접 제목을 적은 것도 있었다. 하인즈와 위스퍼레인의 글씨가 뒤섞인 상태였다.
위스퍼레인은 티켓을 모으는 데만 관심이 있었기에, 티켓 발권기를 다루는 건 오직 하인즈의 몫이었다. 가끔 고장이 나던 발권기는 남자가 죽은 뒤로부터 작동하는 일이 없었다. 사실 위스퍼레인이 다루지 못할 정도로 어려운 물건은 아니었으나 하인즈의 역할을 대신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발권기는 둘이 영화를 보곤 했던 그 작은 방에서 빛을 잃은 채 남겨져 있었다.
그녀는 더딘 속도로 티켓을 한 장씩 확인하더니 <영혼의 색>이라는 제목의 영화 티켓을 꺼내 든다. 머릿속에 깊이 박힌 그 질문의 근원지였다. 위스퍼레인은 바다 방향으로 티켓을 날린다.
잃어버렸으니까 다음에 또 뽑아주셔야 해요.
바닷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종이. 여자는 그게 바닷물에 젖는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본다.
이제 완전히 잃어버린 거야. 사라지는 게 아니야.
거센 파도가 서로 만나며 파란색 티켓을 집어삼킨다. 아니, 온통 파랑이었기에 부서진 건지 물 아래로 숨은 건지 몰랐다. 죽은 남자의 영혼마저.
괜찮아, 돌아오신다면... 똑같은 티켓을 하나 더 뽑아주시겠지. 내가 그렇듯 하인즈 씨도 다시 살아날 거야. 어쩌면 내가 눈치채지 못할 모습으로, 그러나 같은 영혼의 색으로...
여자는 한참이나 바다를 보다가 발걸음을 돌린다. 푸른 파도가 절벽을 미세하게 깎아내린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니까, 커피를 타러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설탕을 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