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자 팬텀과 소환된 악마 모건 타로
@Int_Fantastic 님께서 배포해주신 죄와 벌 스프레드를 사용했습니다! 앤탁님이 리딩해주셨어요^.^
1. 소환 이전의 상황
모건을 불러내기 이전의 팬텀은... 소위 말하는 멍한 상태에 있던 것 같아요. 다만 이 원인이 자신이 '소중히 여겼던 존재를 잃은 것에 대해 충격을 받은 것' 이 아니라, 하나의 자기방어 내지 쿠션으로 작용하는 상태로 보여요. 충격으로 생각을 할 수 없다. 보다는, 의도적으로 생각을 비워서 쇼크에서 빠져나오는 시도를 하는거죠. 다만 자가치유를 시도한다고 해서 멀쩡한 상태라고 단언할 수는 없고, 그의 이런 상태에 대해 이미 많은 사람들이 눈치를 챈 것 같아요. 큰 상실을 겪은 이후부터 팬텀은 어떠한 예술에 대해서도 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종종 암전된 무대에서 객석을 내려보듯이, 저 멀리 아득한 곳을 한참 바라보고 있기도 하고요.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런 팬텀의 눈빛을 본 누군가가 '그건 슬픔에 빠진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라고 말한 점입니다.
2. 모건이 나타날 당시의 상황
사실 모건은... 안 올수도 있었습니다! 후술되겠지만, 모건은 부른다고 오는 타입의 악마는 아닌 모양이에요.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팬텀도 진심으로 모건을 불러 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저 지금 그의 처지와 비슷한 내용의 대본을 낡은 책장애서 발견했고, 그 대사의 일부를 읊었을 뿐입니다.
'이 사랑에 종지부를 찍는다면 악마라도 기껍게 손을 잡으리.'
그리고 어라...? 진짜로 나타나버렸습니다. 악마가요. 모건은 얼른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하는 직장 동료마냥, '불렀어?' 하고 문턱에 기대 눈으로 미스 크리스틴을 좇고 있었습니다. 뭐 하는 여자냐는 듯 쳐다보는 팬텀의 표정은 덤이고요.
3. 팬텀은 어떤 사람인가
팬텀이라는 인간 자체를 논하자면, 모난 듯 둥근 사람이라는 말이 들어맞는 인물입니다. 무대에서 쏟아내는 대사의 수 만큼, 평소엔 쉽게 입을 열지 않고, 이렇게 표현이 적은 부분이 오히려 그의 이미지를 완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오해를 하던 사람들도, 지금 같은 사태에 제 고충을 털어놓지 않고 묵묵히 짊어지는 그의 모습에 '예상보다 좋은 녀석' 이라며 생각을 바꾸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쉽게 지치거나 예민한 부분 (특히 예술적인 조예에 있어서)이 있고, 그를 오래 곁에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 / 그의 곁에 있기 위해서는 상당한 안빈낙도의 태도와 인내심이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그를 당황시킬 수 있는 정도의 배짱이거나요. 물에 잠겨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그저 물에 대해 논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4. 모건은 어떤 악마인가
모건은 앞서 서술하였듯 '부른다고 다 와주는' 타입의 악마는 아닙니다. 소환진을 올리고 제물까지 올려 정성껏 불러내도 자신이 내키지 않는다면 나타나지 않는 편이에요. 주위에서도 성격이 나쁘기로 소문이 났습니다만, 쉽게 욱하거나 비관적이란 이유도 아닌, 무려 '변덕이 죽을 끓는다' 는 이유입니다. 현대판 메피스토펠레스, 아니, 그냥 본인이 메피스토일지도 모를 노릇이에요.
모건은 지금... 부르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나타나 계약이라며 바득바득 우기고, 이걸 빌미로 베일로 덮어둔 팬텀의 슬픔에 대한 감정을 끌어낼 생각입니다. 밭에 숨은 두더지를 갈퀴로 찍어 끄집어내는 행위와 다를 게 없습니다만, 특별히 나쁘거나 잔인하다는 자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녀에게 재밌으면 그만. 거기다 자신은 악마니까요.
내가 너를 위해 노래한다면 너는 나를 위해 애통하게 울부짖을텐가? 기꺼이 욕조에 물을 채워 줄테니 원한다면 얼마든지 잠겨 죽도록 해.
그 차분하던 팬텀이 잔을 쥐어 깨트리는 모습은... 정말이지 살풍경이었다고 하네요.
5. 어떻게 복수하는가
복수 할 대상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야 그 사람은 병으로 죽었는걸요. 제 꽁무니를 쫓아오며 장황한 복수계획을 늘어놓는 모건을, 팬텀은 이제 눈길조차 주지 않고 스쳐가 버립니다. 하지만 이런다고 종용을 멈출 모건도 아니죠.
그런다고 네 슬픔이 끝나는 건 아닐텐데. 병의 탓이야? 그러면, '질병' (질병이라는 이름의 악마.)을 죽여버리자. '죽음'도 같이 죽여버리자. 아니, 아예 묵시록을 없는 일로 만들어버리면 될지도 몰라.
이에 팬텀이 동의했느냐면,
아니요, 그럴리가요. 그럼에도 모건은 그렇게 결정. 이라고 내뱉고는 흥겨운 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합니다. 그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이 사라져도 낙원은 돌아오지 않고, 이미 떠난 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또한 팬텀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요.
6. 팬텀은 모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결론부터 적자면, 팬텀은 모건을 '유치하다' 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건이 정말 악마던 악마 흉내를 내는 인간이던, 자신을 괴롭히려는 의도만큼은 애진즉 알았습니다. 다만 그 방식이 팬텀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집요하고 유치하다고 여기고 있어요. 꼭 열 살 좀 안 된 아이들이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며 괴롭히는 것처럼요. 그는 그저, 한 때 드물게 자신의 감정을 나누어 주었던 그 사람이 그립고, 절반의 자의와 절반의 타의로 슬픔이라는 거대한 심해에 잠겨 고요 속을 유영하는 중입니다. 모건이 자신에게 용을 쓰는 모습을 외려 조금은 딱하다고 여기기까지 해요. 타인의 슬픔을 끌어내게 위해서는 자신이 슬픔을 느껴야 하죠. 혹은 그런 척이라도요. 실로 연기의 기본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팬텀의 입장에서 모건의 '연기' 는 정말이지 형편없습니다. 그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려면 아마 몇 백년은 걸릴지도 모르겠어요.
7. 모건은 팬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모건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합니다. 왜 안 넘어가는 거지? 묵시록의 악마요?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아니, 애초에 말을 타고 내려온다는 전설의 네 기수는 '천사'가 아니었던가요. 정말 죽일 수 있을 리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모건은 팬텀을 붙잡고 성질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빨리 울라면서요. 어서 울어, 슬퍼해. 죽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해서 나를 기쁘게 만들어. 그런데 모건이 돌려받은 답변은 어떤 것이었죠?
그럼 당신이 먼저 날 위해서 울어.
팬텀은 모건의 손을 툭 털어내고, 꼬리가 두 개 달린 예쁘장한 고양이와 함께 복도 한 모퉁이로 사라졌습니다.
일단 나타난 사람이니 쓰라며 마련해준 모건의 방에서, 그날 저녁 내내 무언가 격하게 때려부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별의 별 인간들에게 다 수작을 걸어봤지만 이번엔... 정말 쉽지 않겠다고, 모건은 생각합니다.
8. 복수가 끝난 뒤, 팬텀은?
팬텀의 복수는 제법 허무하게 끝났습니다. 아니, 사실상 모건의 실패라고 보는 것이 맞겠네요. 어느 날 밤, 마치 처음 나타난 그 때처럼 불쑥 팬텀 앞에 얼굴을 들이민 모건은 선언합니다. 질렸어.
악마라도 손을 잡겠다기에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이죠. 팬텀은 냉랭하게 마음대로 하라고 대답했습니다. 애초에 모건이 돌아가던 말던, 그의 심연에는 타인에 발을 디딜 틈 따위는 없었으니까요.
물론 저런 식으로 말을 뱉은 모건이지만, 그녀도 곧장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질렸다고 말은 했지만, 여전히 팬텀의 주위에서 모건의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슬퍼하지 않는다면 분노하라고, 노발대발하며 자신을 쫓아내길 기다린 모양입니다만, 팬텀은 화를 낼 생각도, 울어 줄 의향도 없습니다. 어쩌면 저 악랄한 장난의 기저에는 무언가 알아주길 바라는 호소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뿐입니다. 아마 모건이 있어도, 없어도. 그가 선 극 중의 막이 다시 오르는 일은 없을테니까요. 언제나와 같은 일상입니다.
9. 복수가 끝난 뒤, 모건은?
팬텀은 이제 말을 걸어도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짐 좀 치워 달라던가, 간소한 부탁 정도는 묵묵히 들어주는 것을 보면... 영양가 없는 소리는 완전히 무시하기로 결심한 모양입니다. 이렇게 분한 적이 있었던가요? 보통 이맘때면 자신에게 당한 인간들이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좌절해야 정상일텐데요.
자신은 그저 분하기만 한 걸까요? 아니.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게 슬픔일지도 몰라요. 물론 팬텀이 겪은 상실과는 조금 결이 다르겠습니다만, 어디에서나 원하던 것은 손에 쥐던 그녀가 처음으로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고작 저런 인간에게요. 하지만 이미 그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손안에 사탕을 가득 쥔 채로는 병에서 손을 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팬텀이라는 작자는 그간 그녀가 그래왔듯, 꺼낼 수 없다며 깨 부수기엔 너무나 아까운 병이었습니다.
별 수 있을까요. 그가 원하는대로 해 주는 것이 맞겠죠. 자신이 원하는 걸 쥐기 위해서는요.
10. 계약의 끝
이제 돌아가.
마음에도 없는 위로를 쥐어 짜 팬텀에게 전했을 때, 그는 모건에게 말합니다. 그간 애썼던 건 칭찬해주지. 하지만 내가 당신 앞에서 우는 일은 없어.
그는 이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충분한 눈물을 흘렸다고 말합니다. 남 몰래 숨어서 울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쯤은 모건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때로 사랑이 슬픔을 압도하는 법입니다. 팬텀은 기억 속에 남는 것이 불멸의 의미한다는 말에 찬성하는 남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죽은 이의 초상을 제 정신의 회랑에 걸어둔 채 두고두고 감상하리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고통을 감내하고서라도요.
답답함에 던지듯 울지 않느냐고 묻는 모건의 질문에 팬텀은 답합니다.
당신은 나를 위로했어. 하지만 울지 않았잖아.
그것으로 끝입니다. 가끔 찾아올테니 생각이 바뀌면 울어달라는 말을 남기고 모건은 어딘가로 사라졌습니다. 목재로 된 시계의 초침이 서늘한 소리를 내며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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