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고 깨어났던 하인즈는 공용어를 먼저 배웠다. 물론 소통이 불가능하지 않았어도 확인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모르는 언어로 적힌 기록의 여백이 자신의 상태를 형상화해놓은 것 같다고 때로 생각했다. 무지한만큼,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단순한 종이의 여백은 넓어 보인다.
기표와 기의를 연결하지 못한다면 문자는 낙서보다 못하다. 그리고 이 끊어진 상태가 주는 찝찝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문자와 뜻을 합치지 못한다면 기호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성질 때문에 언어라는 훌륭한 퍼즐을 좋아한다. 로도스에는 그 퍼즐을 나눠 가진 사람들이 잔뜩 모였다.
하인즈는 퍼즐을 제 손으로 맞춰야만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계속 새로운 언어를 익히려 했다. 그러나 로도스의 일이 보통 바쁜가? 하인즈의 일정표를 본 사람은 그가 천천히 다른 언어를 계속 배워나간다는 사실에 백 번 놀랄 것이다. 실제로 배우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특정 지역 출신 오퍼레이터들이 하인즈의 자투리 시간마다 와서 발음 교정을 해주는 모습을 본 적 있는가? 그건 꽤나 귀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다. 몇 주에서 몇 달이 가면 다른 지역의 오퍼레이터들을 찾아간다. 하인즈는 천천히 단계를 밟아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뉘앙스.
미묘한 것을 싫어하는 하인즈가 뉘앙스ㅡ 그 어수룩함을 좋아한다. 미묘함, 차이점, 인상, 번짐, 저편, 무엇으로도 부를 수 있다. 뉘앙스라는 건 그런 존재다. 마치 철학자가 세계의 근원을 탐구하다 결국 모든 것을 이루는 개념을 만든 것처럼, 하인즈는 세계에 존재하는 뉘앙스를, '받아들였다.'
뉘앙스를 알면 어쩐지 모두에게 통하리라는 기분이 드니까. 설령 통하지 않아도 실망할 건 없다. 설령 상대가 뉘앙스라는 '말'을 몰라도 '뉘앙스'는 안다. 오퍼레이터들의 '뉘앙스'를 눈에 담고, 한 번 따라 하고, 배운다. 기호로 정의할 수 없는 그 자연스러운, 고유한 뉘앙스를 하인즈는 좋아한다. 그런 그가 언제나 가장 먼저 배우고 싶어 하는 말은 '환영한다'는 말. 새로 들어올 오퍼레이터들을 신경 쓰는 것이다.
...
오랜 시간이 지나 하인즈는 이베리아 출신 오퍼레이터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베리아어를 배우고 싶은데요. 그곳의 폐쇄적인 특성 때문에 역시 독학은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또 이베리아의 건축 기술 자료를 읽지 못 해 곤란하다는, 박사다운 학구열에 대한 고민도 덧붙이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이유가 하나 더 있다면, 위스퍼레인의 메모를 발견한 적이 있어서일까. 영화를 보고 평론을 쓰는 그녀가 적어둔 몇몇 단어를 하인즈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 종이에 적혀 있던 아직 모르는 글자를 배우고 싶었다. 읽을 수 있게 되면, 그 다음은 찾을 수 있으니까. 그 순간에는 위스퍼레인에게 묻는다. 이렇게 생긴 글자, 어떻게 읽는지 아나요. 그러면 대답이 돌아올 테다. 그러면 뜻은 뭔가요? 여기서 생기는 침묵, 그 순간의 뉘앙스를 예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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