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퍼레이터들이 시간을 때우거나, 상사를 피해 숨거나, 게임을 하곤 하는 휴게실. 이곳에는 낡은 비디오, 테이프 재생기와 작은 TV도 있다. 그 옆에는 영상실에 보관할 필요가 없는 중복된, 또는 아무도 찾지 않는 영화 비디오와 게임 팩이 꽂힌 장식장이 있다.
...오늘은 게임을 즐기는 오퍼레이터들이 모여 대회를 하는 날이 아닌데도 큰 소리가 들려온다. 박수와 비명도 아니고 쾅 하고 무너지는 소리가. 쓰러진 장식장과 전투 후 현장처럼 처참히 흩어진 비디오들. 박사 하인즈와, 위스퍼레인은 그것들을 황망해진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영상실에 없는 비디오를 찾으려 왔는데, 오래되어 붙어버린 표면 때문에 그렇게 우르르 무너질 줄은 몰랐다.
-...
-...
-로도스 가구 경비로 하겠습니다.
-아, 제가...
-괜찮습니다.
-그럼 제가 정리할테니, 박사님은 업무를...
-그것도 괜찮습니다.
위스퍼레인은 그런 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두 사람은 원래 비디오가 어떻게 꽂혀 있었는지 완벽히 기억할 수 없으므로, 나름의 기준으로 다시 정렬한 뒤 안내문을 붙이는 게 낫겠다 판단한다.
-<블랙 온 블랙>.
-역사요.
-<화중유시>.
-아마 로맨스였죠?
쪼그리고 앉아 팔을 바삐 움직이다 결국 바닥에 털썩 앉는다.
-<재회할 결심>
-<스펠 앤 본드>
-<테라 인베이더>... 이건 게임팩 쪽으로.
-그러고보니 방금 꽂은 <헤이트리스8>은,
-아, 저건 예전에...
-로빈 씨가...
정신없이 달려가는 시간과 그것의 발자국만큼 채워진 장식장. 어느새 한 칸만 남았다.
-<감염쉐라그에서 살아남기>는 액션일까요, 재난일까요?
하인즈가 던진 질문에 그가 예전에 한 말이 생각난다. '평생 영화를 봐도 세상의 모든 영화를 보지 못 한다'고. 그런 거창한, 인생의 깨달음을 얻은 듯한 말을 단지 B급 오락 영화를 보기 싫어서 내뱉었다는 걸 함께 떠올리자 웃음이 나온다.
-왜 웃죠?
-아무것도 아니에요.
기억하고 있으려나.
-좋아했던 영화가 있다면 비디오를 빌려가도 좋을 텐데요.
우리의 첫 대화도 분명 영상실에서였다.
언제 이렇게 웃을 수 있게 되었는지... 위스퍼레인은 잠시 애틋해진다. 자신을 반겨주는 로도스의 사람들, 비디오를 훑을 때마다 그 영화를 닮은 사람이 떠오른다.
-좋아요, <개들의 침묵> 까지. 이제 8개만 더 꽂으면 됩니다... 시간이 꽤 지났네요. 뭔가 일정에 차질이 생기진 않으셨습니까?
-위스퍼레인 씨?
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어느 인물과도 같은 사람, 이걸 추천해주고 싶은 사람... 이곳에 있으면 평생 스쳐지날 사람들의 소중한 삶을 볼 수 있다. ... 그리고 그런 말을 하면 대부분 이해할 수 있을 하인즈라는 사람이 옆에 있다.
위스퍼레인은 애틋해서,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살풋 배어나는 웃음을 숨기지는 않기로 했다.
-네, 괜찮습니다.
-제가 조금 늦어도... 모두 이해해줄테니까요.
하인즈는 그런 위스퍼레인에게 비디오를 건넨다.
-늦지 않을 겁니다. 하나 남았거든요.
-벌써요...
-생각하시는 동안?
<궤적>.
위스퍼레인은 마지막 비디오를 꽂는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먼저 나가보겠다며 돌아선다. 하인즈는 그 모습을 보다가 문이 닫히면 다시 꽉 찬 장식장을 본다.
-음, 게임 팩 위치가 너무 높았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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